3·1 만세운동 다음 날인 1919년 3월 2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러나 주일 예배를 제대로 드린 교회는 없었다. 거사를 위한 비밀 집회가 주로 교회에서 이뤄져, 수많은 목사와 신자들이 감옥에 끌려가고 예배당은 폐쇄됐다. 제암리교회 학살 등 일제의 보복이 시작되자 신자들은 집이나 은신처, 차디찬 감옥에 엎드려 예배를 드렸다.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그곳이 교회였다.
선교사 감부열(아치볼드 캠벨)은 1916년부터 40년간 한국에서 사역했다.
매서운 12월의 밤, 북한 산간 마을을 지날 때 어느 집 창호문을 뚫고 흐르던 낮은 곡조의 찬송이 그의 발길을 붙들었다. 노동으로 지친 몸을 누이기 전 감사 예배를 드리는 이들의 정금(正金) 같은 신앙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도 찬송은 울려 퍼졌다. 나무판자로 벽을 막고 총알이 뚫은 함석판으로 지붕을 인 곳에서 ‘샛별 같은 그 보배’를 노래하던 피란민 아이들. “내 평생 이에 견줄 만한 예배는 없었다”고 고백한 그는 “한국인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한 ‘인격’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였다”고 썼다.
한국 개신교 100년의 역사는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 3·1 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민족 계몽 운동, 민주화 운동, 여성 운동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화의 수레바퀴였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서사가 질곡의 현대사와 맞물려 신앙은 뜨겁게 타올랐고 374교단, 976만 신자라는 세계 유례가 없는 부흥을 일궈냈다.
위기는 풍요와 안락의 시대에 왔다. 2020년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 바이러스는 기복주의와 세습, 물신화로 흔들리던 교회의 균열을 강타했다. 정부가 교회를 코로나 확산의 주범으로 낙인찍으면서 신자들이 이탈하고, 국민 열에 일곱이 교회의 코로나 대응을 비난했다.
혼돈의 뿌리에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근본주의 신학이 있다. 코로나 확산에도 일부 교회가 현장 예배를 강행한 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십계명 때문이었다. 목회자 몇은 “방역은 사기”라고 선동했다. 그러나 페스트가 유럽을 휩쓴 16세기 초반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전염병을 피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시험하는 것이다. 나는 소독해 공기를 정화할 것이고, 약을 조제해 먹을 것이다. 전염병을 퍼뜨리는 일은 마귀의 행동과 같다”고 했다.
일부 교회의 아집과 맹신은 놀랍게도 현실 권력을 닮았다. ‘믿습니다’만 외치면 구원받는다는 반(反)지성은 “우리 주군은 무오류”라며 맹종하는 무리와 닮았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란 구호는 내 편이 아니면 적폐로 응징해야 한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회개와 성찰은 없고, 궤변과 요설로 대중을 현혹한다. 우상 숭배, 광기의 집단들이 대개 그러했다.
온라인 설교로 만난 신학자 김경진(소망교회 담임목사)은 “하나님이 이 땅에 전염병을 허용한 것은 이단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독단으로 가득한 교회의 모습을 똑바로 보게 하려는 경고”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과연 세상의 빛과 소금인가.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변화하고 행동하는 신앙으로의 전환점이었던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은 교회 지도자들의 회개와 눈물에서 시작됐다. 일제 탄압에도 교회가 민족의 소망이 된 것은 병든 자를 치료하고, 주린 자를 먹이며, 십자가 고난도 마다하지 않은 예수의 삶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대신 독단과 단죄로 치달을 때 교회는 파시즘의 희생양이 된다. 실정(失政)을 감추려 코로나를 악용하는 이들에게 또 한번 마녀사냥의 빌미를 주는 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